패션  Nos Dames de Paris
ZOH
 ‘파리지엔 시크’. 적당히 낡은 레더 블루종 위로 늘어뜨린 적당히 헝클어진 머리, 얇은 입술에 아무렇지 않게 발린 빨간 립스틱, 어떤 옷에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앵클 부츠, 약간  쌀쌀맞은 듯한  애티튜드까지. 그렇다, 파리의 여자들은 시크하다. 그런데 우리들, 파리지엔이라는 단어에서 마담이라는 단어를 연상해 본 적이 있을까? 파리지엔은 파리의 여성, 파리에 사는 여성을 뜻한다. 이 단어의 어디에도 ‘어린’ 또는 ‘젊은’의 의미는 들어가 있지 않다. 고로 파리의 중년 여성들을 파리지엔 시크에서 배제한다는 건 안될 말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파리 중년(혹은 노년) 여성들은 이십대보다 패셔너블하다. 성인이 되면 독립하여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프랑스의 분위기상,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래서 나는 거리로 나섰다. 파리 거리의 아줌마, 혹은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서.  물론 프렌치 할머니들이라고 해서 다들 탄성을 지를 만큼 멋지게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2.55 백을 들고 에르메스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도, 나이를 믿을 수 없을만치 군살하나 없는 몸매에 과감한 노출을 불사한 몸짱 아줌마도 아니다. 발레리나 플랫이나 벤시몽 스니커즈를 신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고, 소매가 해진 재킷을 빈티가 아닌 빈티지한 감성으로  소화하는 일상 속의 파리지엔들을  담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세브르 바빌론 근처의 한 은행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백발의 그녀였다. (사실 나는 염색하지 않은 백발의 노인들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 새까맣게 염색한 머리보다 나이는 들어보일지언정, 젊은 이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중후함과 멋스러움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 블랙 트렌치에 진, 앵클부츠를 매치한 그녀의 룩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툭 얹은 듯한 회색 무명천의 넓은 체크무늬 스카프. 오후 햇살에 반짝거리는 은빛 헤어와 함께 전체적으로 어두운 스타일링에 빛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이름은 말해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탓에 약간 소심해진 채로 계속 길을 걷던 내 눈에 두번째로 띈 것은 장을 보러 가던 다니엘danielle이었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흔쾌히 사진촬영을 허락해 준 그녀는 조금도 애쓰지 않은 듯한, 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룩을 보여주고 있었다. 몸통에 밝은 톤의 새틴이 덧대어진 보라색 트렌치 코트가 단정하게 귀 뒤로 넘긴 갈색의 짧은 머리와 부드러운 컬러매치를 이루었고 높은 네크라인 위로 살짝 보이는 볼드한 실버 목걸이는 스타일링에 적당한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 외에도 조금 더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여성들이 쉴 새 없이 눈 앞을 지나갔으나 사실 일상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에게 사진촬영을 허락받는 일도, 파리의 좁은 길목에서 원하는 그림을 얻어내는 일도 녹록치 않았다. 내가 본 것의, 그리고 담고 싶었던 것의 반의 반도 채 담아내지 못했다는 고백이자 변명이다. 그녀들은 포즈를 취하는 데 익숙한 패션피플이 아니고, 나는 스콧 슈만이 아니다. 그녀들은 프레임 안에서보다 일상 속에서 움직일 때 더 매력적이고, 나는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조금 가슴이 아팠다. 우리 할머니가 떠오르고, 우리 엄마가 떠오르며, 한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그녀들에게 있어 패션은 사치이거나 사치를 누릴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경우가 많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들의 스타일에는 다소 경직되고 획일화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껏 부풀린 브로콜리 머리와 명품백, 혹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컬러와 패턴의 의상에는  ‘두려움’이 스며들어 있다. 일정한 연령대가 되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압력이 강한 한국사회에는  ‘나이에 걸맞는 여성의 스타일’이라는 잣대 역시 분명 존재한다. 나이는 찼는데 결혼계획은  없는 여성이 (심지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나 딱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경우에도) 하나 둘 시집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동년배의 여성들과 함께 ‘걸맞는’ 스타일을 유지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누가 누가 옷을 더 잘입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모든 프랑스 여성이 한국 여성들보다 스타일리쉬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의 어머니들이, 더 바란다면 우리의 할머니들까지도 조금 더 다양한 아이템에 눈을 돌리고 조금 더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열린 애티튜드를 가졌으면 하고,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는 나이 든 파리지엔들을 보며 소망했다.
 


ZOH
프랑스와 애증의 관계를 5년째 이어가고 있는 애주가. 한국에서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프랑스에서 불문학과 연극을 공부하고 있다. 몸매도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아서 시즌별로 쏟아져 나오는 눈부신 아이템들을 사모으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시크한 빠리지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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